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데이 노부유키 (문단 편집) == 상세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onyCEO2.jpg|width=500]] 2005년 소니의 이사진하고 함께 찍은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데이 CEO며 가운데는 당시 새롭게 취임했던 [[하워드 스트링거]] CEO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추바치 료지 사장. 1937년 일본 도쿄에서 출생. 아버지는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교수였으며 이데이 노부유키도 1960년 3월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다. 후에 와세다대학에서 법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0년대 소니의 초창기 시절부터 인턴으로 활동했으며 60년 대학교를 졸업하고 소니에 입사했다. 제네바 국제 연구 대학원에서 유학을 하면서 소니 유럽에서 9년 동안 근무해 국제적인 감각을 익히고 프랑스어와 영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국제적인 감각과 탁월한 영업 능력이 인정되어 초고속으로 승진해, 소니 오디오 사업 부문 부장 및 홈 비디오 사업 부문 부사장직을 거친 후 1989년 소니의 이사로 선정되었다. 이후 전무 이사와 1990년대부터 광고 선전 분야 본부장도 추가로 역임하여 소니의 이미지에도 크게 기여한다. 1994년에는 소니의 상무 이사가 되었으며 1995년 6월 14명의 다른 경쟁자를 제치고 소니의 사장으로 선정되었다. 원래 창업자인 [[모리타 아키오]]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엔지니어 출신에 이공계 쪽 사람을 채용하라고 말했고 회사 내부에서도 엔지니어 출신을 선임하려고 했으나, 이공계 차기 사장으로 지목된 사람들이 스캔들에 휩싸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소니의 CEO였던 [[오가 노리오]]가 이데이가 제출한 3개의 보고서를 보고 감명을 받아 "이데이는 영업분야(인문) 출신이지만 기술에 밝다" 라고 추천해서 이데이가 사장이 되었다. 사장으로 선임된 이후 디지털 드림 키즈(Digital Dream Kids) 전략을 발표하며 대대적으로 조직을 개편했다. 디지털 드림 키즈 전략은 전세게 IT 사업가들에게 귀감이 되어서 1997년 비즈니스 위크지에서 세계 최고의 사업가로도 선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1995년 취임 당시만 해도 부채로 허덕이던 [[소니]]를 여러 혁신을 통해 반석에 올려놓았고, 1998년에 역대 최고의 영업이익을 올리며 일본의 동일 업계를 놀라게 해 자극을 주었다. 1999년에 정식으로 소니의 CEO로 취임한 이후, 2001년 라스베이거스에서 디지털 드림 키즈의 핵심인 Ubiquitous Value Network (유비쿼터스 밸류 네트워크)를 발표했는데 이 전략은 다가오는 광대역 네트워크 시대를 맞아 소니의 기기와 콘텐츠를 네트워크로 언제 어디서든 연결할 수 있게 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당시 소니의 사장이었던 안도 구니타케는 소니의 방향성이 더 이상 가전 기업이 아닌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변화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8/0000156641|#]]] 이는 [[Apple|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당시 주력 제품이었던 [[Mac(컴퓨터)|Mac]]을 중심으로 계획한 디지털 허브 전략과 함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한 전략으로 평가 받았으나 애플과 다르게 소니의 이데이 CEO는 그 계획을 정확히 실행하지는 못했다. [[https://blog.naver.com/businessinsight/221114733773|#]] 금융 사업을 확대하고 인터넷 같은 네트워크 사업에 많은 투자를 했다. 각 사업부의 제품들을 하나의 네트워크에 연결시키려고 했으나 구체성이 결여되면서 각 사업부가 따로 노는 상황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사일로 현상[* 조직 부서들이 서로 다른 부서와 담을 쌓고 내부 이익만을 추구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 곡식 및 사료를 저장해두는 굴뚝 모양의 창고인 사일로(silo)에 빗대어 조직 장벽과 부서 이기주의를 의미하는 경영학 용어로 사용된다.]을 초래하여 소니의 사업부끼리 서로 반목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로 인해 몰락하기 시작했다. 이데이는 다가오는 모바일 사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2001년 [[에릭슨]]과 합작으로 모바일 사업을 진행하지만 여기서도 에릭슨과의 의견 차이와 계획의 모호성으로 인하여 큰 성과를 내지 못하였으며 이러한 문제는 에릭슨의 지분을 인수한 현재까지도 개선되지 않아서 모바일 사업이 소니의 발목을 잡고 있다. 결국 1998년 최고의 실적을 올리며 승승장구하던 이데이 노부유키는 2003년 소니 쇼크라 불리우는 주가 폭락을 맞으며 위기를 맞이했고 무너진 신뢰와 브랜드 가치를 다시 되찾기 위해 프리미엄 브랜드인 [[소니 퀄리아]]를 발표하고 [[큐리오]]와 같은 신사업을 발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크게 실패했다. 결국 이데이 CEO는 미래를 내다보는 좋은 전략과 아이디어가 있었으나 가지고 있는 역량과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 하고 여기 저기 문어발식으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여 소니의 추락의 원인을 제공한 CEO로 평가받았다. 2005년 부진의 책임을 지고 CEO의 자리를 [[하워드 스트링거]]에게 물려주게 된다. 이데이는 2007년 소니의 최고 고문 자리에서 사임하면서 소니의 경영에서 완전히 물러났으며 2012년에는 최고 자문위원회 의장에서도 퇴임하여 이제 소니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이후 2006년에 자신이 설립한 퀀텀 리프 코퍼레이션의 대표로 있으면서 IT 분야 차세대 젊은 지도자를 육성하려 노력하고 있으며 [[레노버]]의 사외이사로 활동하였다. 2022년 6월 2일 향년 84세로 타계했다. 저서로는 "일본 대전환"과 "일본 진화론" 등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